신민회와 105인 사건
신민회(新民會)는 개항과 일제의 국권 침탈이라는 역사적 소용돌이에서 기독교 민족 운동을 전개한 단체로 일제의 한국 기독인 탄압의 큰 사건인 105인 사건의 배경이 되는 단체입니다. 신민회 조직의 배경과 활동 그리고 105인 사건과 의의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1 신민회 조직의 배경
개항과 같은 시기에 수용된 한국의 기독교는 반봉건과 반외세라는 역사적 과제를 떠안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는 자본주의 국가들이 치열한 대외 팽창과 세계분할 경쟁에 나섰던 제국주의 시대에 해당되며 뒤늦게 참여한 일본의 대륙침략이 노골화되는 시기였습니다. 아시아 국가들에 전파된 기독교는 거의 예외 없이 제국주의 침략의 도구로 이용되었는데 유독 한국만은 비기독교 국가인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이점에서 한국의 경우 기독교와 민족운동이 결합될 수 있는 요건이 형성됐다고 하겠습니다.
기독교계 인사들이 항일 민족운동에 직접 참여한 시기는 3 시기로 나뉘는데, 1 시기는 1905년 을사 5 조약의 체결로 외교권이 강탈당하던 시기, 2 시기는 사실상의 주권상실을 의미하는 정미 7 조약이 체결되던 1907년까지의 시기, 그리고 3 시기는 1910년 일제에 의해 한일합방이 되던 시기입니다.
을사 5 조약이 체결된 1905년의 기독교계 민족운동 방법은 '구국기도회'가 주를 이루었습니다. 형식은 기도회로 진행됐지만 사실 그 내용은 정치집회 성격이 강했습니다. 기도회를 주도한 상동청년학원 회원들은 후에 신민회의 핵심적 회원들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기독교의 기초적 민족운동은 신민회의 조직과 활동, 각종 무장투쟁과 경제저항운동 등으로 발전하였습니다.
2 신민회의 활동
신민회가 비밀리에 조직된 것은 1907년 4월 20일경이었습니다. 신민회의 창립을 주도한 안창호가 미국에서 귀국한 지 2달만의 일이었습니다. 신민회 창립 발기인들은 상동청년학원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습니다. 표면적 설립 목적은 구시대의 사상과 관습을 타파하여 근대적인 교육과 산업을 육성시켜 '유신한 국민을 통일연합하여 자유문명국을 세우라'는 것이었지만 궁극적 목적은 상실되어 가는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비밀결사로서 근대적 공화정을 세우고 외세 침략을 물리친 후 명실상부한 자주독립국가를 수립하는 것이었습니다.
안창호, 양기탁, 전덕기, 이갑, 유동열 등이 수차례에 걸친 밀회를 통해 신민회를 조직했습니다. 그 결과 서울에 중앙조직을 두고 각처에 지방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서북지방은 교회와 학교의 교사와 학생, 그리고 토착상공업자를 중심으로 신민회 지방 조직을 결성했습니다.
신민회의 회원 대부분은 기독교인으로 105인 사건으로 드러난 통계를 보면 기소자 123명 중 장로교인이 96명, 감리교인이 6명, 동학교인이 2명, 천주교인 2명 등 총 104명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신민회 회원의 대부분이 기독교인이라서가 아니라 신민회가 지향하는 목표와 실천활동이 민족의 정치, 경제, 교육, 산업 등 사회 전반에 걸친 문제점과 일본의 외압을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이었기 때문에 신민회가 민족운동 단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국권을 회복하고 자주독립국가를 세우기 위해 실력을 키워야 한다는 '실력양성론'은 민족교육기관을 설치하는 교육구국사업과 민족산업 육성사업으로 전개되었습니다.
1907년은 한국 기독교사에서 하나의 분기점을 이룬 시기였는데 한편에서는 선교사와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부흥운동이 전개되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정치적 구국비밀 단체인 신민회가 결성되었기 때문입니다.
3 105인 사건
105인 사건은 일제가 한국을 합방한 직후 국내 애국인사들을 한꺼번에 제거할 목적으로 날조한 대규모 항일민족운동 탄압사건이며 한국교회에 대한 최대의 박해사건입니다.
일제는 합방을 전후한 시기에 한국 통치에서 가장 부담스러운 계층이 기독교인층이라는 것을 깨닫고 합법성을 가장한 기독교인 탄압 즉 105인 사건을 날조합니다. 당시 105인 사건의 공식 명칭은 '데라우찌총독 모살미수사건'입니다. 일제는 서북지방에 근거를 두고 있던 기독교계 인물과 애국계몽운동의 지도자급 인사를 소탕하기 위해서 '서북지방의 윤치호, 양기탁, 안태국, 이승훈, 옥관빈 등이 서울 서대문의 임치정 집에서 수차례 밀회를 갖고 압록강 철교 준공식에 참석하는 데라우찌총독의 암살을 모의했다.'라고 하는 허위사건을 조작하였습니다.
이렇게 신민회를 중심으로 한 애국인사들을 700명가량 구속하고 1심에서 105명에게 유죄선고를 내렸는데 실형을 선고받은 사람이 105명이기 때문에 '105인사건'이라고 합니다. 본래 이 사건에 정식 기소된 사람은 123명이었는데 당시 기소자 123명을 동시에 수용할 만한 재판정이 없어서 재판정을 신축할 만큼 규모가 큰 사건이었습니다.
그 후 1913년 3월 20일 최종 공판에서 윤치호, 양기탁, 안태국, 이승훈, 옥관빈, 임치정에게 징역이 선고되고 나머지 99명은 무죄가 선고되었습니다. 대부분이 무죄로 풀려날 만큼 일제의 조작은 엉성한 것이었지만 72종의 모진 고문과 악독한 신문과정을 통해서 신민회라는 비밀결사의 실체가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4 사건의 의의
신민회와 105인 사건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개항 이후 최대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의 몇 가지 의의를 살펴보면, 첫째, 이 사건을 계기로 선교사와 민족운동 진영 사이에 다소간 야기되었던 불신과 괴리 현상이 크게 회복되었고, 둘째, 이 사건에 기독교인이 다수 연관되어 갖은 고초를 당함으로써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이 더욱 고양되었으며, 셋째, 고난과 수난을 통해 보다 성숙한 신앙을 갖게 되는 기독교적 의미를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S 슈노아이와 함께 하는 흥미로운 기독교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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