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선교와 교육선교 - 세브란스병원과 배재학당
CONTENTS
세브란스병원
스크랜튼과 그 밖의 선교사들에 의한 병원들
배재학당
그 외 학교와 여학교들
한국 개신교 초기에는 한국사회의 보수적인 분위기 때문에 직접적인 복음전도보다는 의료와 교육사업을 통한 간접적인 선교방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 세브란스병원
알렌에 의해 가장 먼저 의료선교가 시작되었는데 1884년 10월에 미국 공사관의 의사로 한국에 들어온 그는 갑신정변 때 중상을 당했던 민영익을 치료해 줌으로 왕실의 신임을 얻었습니다. 갑신정변 때 처형 당한 홍영식의 집(재동에 소재)을 하사 받은 그는 1885년 4월에 광혜원(곧 제중원으로 개칭됨)을 세우고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근대병원을 시작했습니다.
이 조선 정부의 왕립병원을 통해 다른 선교사들이 합법적으로 선교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1885년 4월에 들어온 언더우드가 교사 자격으로 이곳에 머물며 우리말을 공부했고 감리교의 스크랜튼도 1885년 6월까지 이곳에서 의사로 일했습니다. 1886년 엘러즈(A. Ellers)도 여자의사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에 들어와 이곳에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뒤 제중원은 1887년 남대문 안 구리개(지금의 을지로)로 옮겨졌고 선교사직을 사직한 알렌의 뒤를 이어 헤론이 맡아 운영하였습니다.
이 병원은 1894년 에비슨(O.R. Avison)에 의해 운영되다 미국인 실업가 세브란스(Louis Henry Severance)의 건축기금으로 남대문 밖에 새 건물을 마련하게 되어 오늘날의 세브란스병원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2 스크랜튼과 그 밖의 선교사들에 의한 병원들
감리교의 스크랜튼은 1885년 9월 10일에 정동에서 민간 의료기간으로 진료소를 시작했습니다. 그 뒤 새 건물을 마련하고 1886년 6월 15일에 정식병원으로 시병원(施病院)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왕립병원인 제중원과는 다르게 소외된 계층에게 다가간 시병원은 좀 더 적극적으로 민중계층과 접촉하기 위해 궁궐과 외국공사관이 즐비한 정동을 떠나 1894년 남대문 근처 빈민지역인 상동으로 병원을 옮겼습니다. 병원뿐 아니라 상동교회, 아현교회, 동대문교회 등을 세워 복음전파에 더욱 힘썼습니다.
1887년 10월에 한국에 온 하워드 (M. Howard)에 의해 여성전용 병원도 시작되었는데 보구녀관(保救女館)이 그것입니다. 조선 사회에서 소외당한 또 다른 계층인 여성들이 의료혜택을 받게 되고 더 나아가 간호, 의료교육까지 받게 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외에도 동대문, 애오개, 모화관 등지에 진료소가 개설되었고 성공회에서 운영하던 낙동병원도 있었으며 지방에도 선교사들에 의한 진료소들이 개설되어 복음전파의 장이 되었습니다. 특히 지방 진료소들은 돈 없는 소외계층에게 거의 무료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해 줌으로 인해 그들이 기독교를 접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3 배재학당
교육사업에 의한 선교도 보수적인 조선사회를 여는 좋은 계기가 되었는데 1885년 4월에 들어온 언더우드나 아펜젤러는 목사였지만 공식적으로는 교사였습니다. 그들은 제중원과 정동 진료소에 교사로 있으면서 학생들 몇 명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에 의해 학교설립이 추진되었습니다. 아펜젤러는 이미 1885년 11월에 미국공사 폴크를 통해 고종의 학교설립허가를 얻어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886년 6월 8일 2명의 학생을 데리고 정식 학교를 시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한국근대교육의 효시인 배재학당(培材學堂)입니다. 영어로 출세를 해보고자 하는 열망과 맞물려 문을 열자마자 학생들이 몰려들어서 5개월 만에 32명의 학생 수를 기록하게 됩니다.
4 그 외 학교와 여학교들
장로교의 언더우드는 고아원 형태로 학교를 시작했는데 그것은 고아나 극빈자 아동을 수용해서 기술을 가르치는 일종의 기술학교였습니다. 1886년 5월 11일 정동에서 학생 한 명을 데리고 정식 출발을 하였는데 언더우드학당, 예수교학당, 민로아학당, 구세학당 등으로 불리다가 1905년에 경신학당으로 정착하여 오늘날 경신학교의 모체가 됩니다.
1886년 5월 31일에 스트랜튼 부인에 의해 미감리회의 이화여학당이 시작되고 1887년 6월 엘러즈에 의해 북장로회의 정동여학당도 개설되어 여자학교가 시작되었습니다. 여자학교는 초창기에는 남존여비사상 때문에 학생모집이 어려웠습니다. 따라서 초창기 학생들은 고아나, 과부, 첩과 같은 소외계층이었습니다.
이렇게 의료와 교육선교로 시작된 개신교는 은혜를 입는 입장인 민중계층에게 더 잘 받아졌고 성례집행으로 시작된 천주교와는 조금 다른 양상으로 간접선교를 추구하여 상당히 효과를 보게 되었습니다.
S 슈노아이와 함께 하는 흥미로운 기독교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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